John C. Calhoun (03/18/1782-03/31/1850).
존 C. Calhoun (03/18/1782-03/31/1850)
존 C. 칼훈(John C. Calhoun)은 1825년부터 1832년까지 미국의 제7대 부통령을 지낸 미국의 정치인이자 정치 이론가이다. 그는 19세기 초 노예제를 지지하는 주와 주들의 권리 운동의 지도자였으며, 무효화 위기에서 중요한 인물이었다.
얼리 라이프
칼훈은 1782년 3월 18일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애브빌에서 패트릭 칼훈과 그의 아내 마사 콜드웰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지역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그 후 뉴저지 칼리지(현재의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1804년에 졸업한 후, 그는 법학을 공부했고 1807년에 변호사 자격을 얻었다.
정치 경력
칼훈은 1808년 사우스캐롤라이나 하원의원으로 정치 경력을 시작했고 1811년부터 1817년까지 미국 하원에서 일했다. 이 시기 동안 그는 외교 정책에 강한 관심을 갖게 되었고 1812년 전쟁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칼훈은 1817년 미국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817년부터 1825년까지 전쟁 장관을 지냈다.
1825년, 칼훈은 존 퀸시 애덤스 대통령 아래 미국의 7번째 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사우스 캐롤라이나에서 미국 상원의원이 되기 위해 사임한 1832년까지 이 직책을 맡았다.
무효화 위기
칼훈은 1832년부터 1833년까지의 무효화 위기에서 자신의 역할과 주의 권리에 대한 강한 옹호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이 위기에서 사우스캐롤라이나는 위헌이라고 판단한 연방 관세법을 무효로 선언하려 했다. 칼훈은 각 주들이 위헌이라고 판단한 연방법을 무효화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결국 미국 대법원에 의해 기각되었다.
라이터 라이프
칼훈은 1845년 상원으로 돌아와 1850년 사망할 때까지 재직했다. 그는 텍사스의 합병을 지지하기도 했지만 주들의 권리와 노예 제도를 계속 옹호하였다. 칼훈은 또한 멕시코-미국 전쟁과 1850년 타협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50년 3월 31일 워싱턴 D.C.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19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 이론가 중 한 명으로 기억되며, 미국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기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