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C. 칼훈 (1823)

존 C. 칼훈 (1823)

존 콜드웰 칼훈()은 미국의 정치인이다. 1825년부터 1832년까지 미국의 제7대 부통령을 지냈으며, 민주당의 노예제 찬성파 지도자였다. 칼훈은 노예제도와 주들의 권리에 대한 확고한 옹호로 가장 잘 알려져 있으며, 이는 1832년부터 1833년까지 무효화 위기를 초래했다.

얼리 라이프

칼훈은 1782년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애브빌에서 태어났다. 그는 사우스캐롤라이나주에 정착한 스코틀랜드계 아일랜드 이민자 패트릭 캘훈의 넷째 아이로, 지역 농장주의 딸 마사 콜드웰과 결혼했다. 그의 아버지는 큰 농장과 30명 이상의 노예를 소유한 성공적인 농장주였다.

칼훈은 고향에서 학교를 다녔고, 후에 예일 대학교에 입학하여 1804년에 졸업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 그는 법학을 공부했고 1807년에 변호사 자격을 얻었다.

정치 경력

칼훈은 1808년 사우스캐롤라이나주 하원의원으로 선출되면서 정치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1810년 재선되어 1817년까지 재임했다. 그는 1811년부터 1817년까지 미국 하원에서, 1817년부터 1832년까지 미국 상원에서 일했다.

1824년, 칼훈은 존 퀸시 애덤스 대통령 밑에서 미국의 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1828년 앤드루 잭슨 대통령 아래에서 미국의 부통령으로 재선되었다.

무효화 위기

1830년대에 칼훈은 주들의 권리와 노예 제도의 주요 지지자가 되었다. 그는 연방정부가 개별 주의 권리를 간섭할 수 있는 권한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고, 노예제도는 연방정부가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1832년 칼훈은 사우스캐롤라이나주 무효화령을 제안하여 주의 권리를 방해하는 어떠한 연방법도 무효라고 선언하였다. 이것은 1832년부터 1833년까지 연방정부와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사이에 타협이 이루어졌을 때 비로소 해결된 무효화 위기를 촉발시켰다.

후생과 유산

1844년 칼훈은 상원에서 사임하고 사우스캐롤라이나로 돌아왔다. 그는 1850년 6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칼훈의 유산은 복잡하다. 그는 노예제도와 국가의 권리에 대한 확고한 옹호자였지만, 19세기 미국의 정치 사상을 형성한 뛰어난 정치 이론가이기도 했다. 그는 미국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명으로 기억된다.